
옆자리 마케터가 미드저니로 뽑은 시안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는 장면, 다들 한 번쯤 보셨을 거예요. 생각보다 괜찮아서 놀라셨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한마디가 이어졌겠죠.
"오, 이 정도면 됐네."
그 순간 마음이 복잡해지셨을 거예요. 시안의 빈틈이 분명 보이는데, 그걸 짚자니 밥그릇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망설여지고. 무엇보다 불편한 건, '이 정도면 됐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거였을 거예요.
이 불편함을 그냥 넘기면 결국 결과물로 경쟁하게 돼요.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그런데 상대가 기계인 게임이라 시작부터 승산이 없어요.
다행히 애초에 이 게임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요. 디자이너의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만 알면요. 시안을 뽑는 게 일의 전부라면 대체되는 게 맞지만, 사실은 일의 끝자락일 뿐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다 읽고 나면 AI가 뽑은 시안 앞에서 흔들리는 대신, 그게 정확히 어디까지 대체한 건지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
시작은 조금 독특한 학교 이야기예요. 디자인 학교인데 포토샵도 일러스트도 가르치지 않는 곳이에요.

스탠퍼드에는 d.school이라는 곳이 있어요. 2005년 IDEO 창업자 데이비드 켈리가 세운 디자인 학교예요. 그런데 커리큘럼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어요. 포토샵도, 타이포그래피도, 색채학도 없어요. 심지어 모이는 학생들 상당수가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에요. 경영, 공학,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디자인을 배우러 찾아와요.
실제 프로젝트 하나를 보면 감이 와요. 2007년, 한 학생 팀이 개발도상국을 위한 초저가 인큐베이터를 만들라는 과제를 받았어요. 당시 인큐베이터 가격이 2만 달러가 넘었으니, 100분의 1로 낮추라는 셈이었죠. 그런데 이 팀은 곧바로 설계에 들어가는 대신 네팔 현장으로 먼저 갔고, 거기서 과제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발견해요.
위험에 처하는 미숙아 대부분이 병원이 아니라 전기도 불안정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있었거든요. 병원에 저렴한 인큐베이터를 넣어봐야, 정작 아기들은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팀은 문제를 다시 썼어요. '더 싼 인큐베이터'가 아니라 '병원이 없는 곳에서 부모가 직접 아기를 따뜻하게 지킬 방법'으로요. 여러 번의 시제품 끝에 도달한 답이 전기 없이 작동하는 침낭형 보온기, 엠브레이스였어요.
세계 곳곳의 아기들에게 닿은 이 물건은 잘 그려서가 아니라, 문제를 다시 정의해서 나온 결과였어요.

그러니까 이 학교가 가르치는 건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방식이에요. 사실 이게 디자인이라는 일의 원래 정의이기도 하고요. 로고는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문제의, 패키지는 '골라야 할 이유가 없다'는 문제의 해결책인 거죠. 완벽한 브랜딩의 종말에서도 다뤘듯,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지가 먼저예요.
낯설게 들리면 업계 용어로 확인해 볼 수 있어요. 직접 그리지 않고 방향만 정하는 사람도 여전히 디자이너라고 불러요. 아트디렉터가 그렇죠. 반대로 시키는 대로 그리기만 하는 사람은 손이 아무리 좋아도 오퍼레이터라고 불려요. 그리기를 빼도 디자이너인데, 문제를 다루는 일을 빼면 디자이너가 아니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도 디자인이 '만드는 일'처럼 여겨져 온 건,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귀했던 시대의 흔적에 가까워요. 그 능력이 흔해진 지금, 가려져 있던 원래의 일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다만 정의를 아는 것과 그렇게 일하는 건 다른 문제예요. 다행히 이 방식에는 이미 정리된 지도가 있어요.
그 지도가 디자인씽킹이에요. 공감, 문제 정의, 아이디어 도출, 프로토타입, 테스트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요. d.school의 방법론을 저희가 브랜딩 프로젝트에 대입해 보면, 각 단계는 이렇게 이어져요.

첫 번째 공감은 사용자 조사 보고서를 읽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지켜보는 거예요. 설문에는 "만족한다"라고 적은 사람이 실제 매장 입구에서는 머뭇거리다 돌아나가요. 그 틈이 책상에서는 절대 안 보이는 재료예요.
두 번째 문제 정의가 다섯 단계 중 승부가 갈리는 지점이에요. 핵심은 요청받은 문제를 그대로 받아 적지 않는 거예요. "로고를 새로 해주세요"라는 요청과 현장에서 본 것이 어긋난다면, 진짜 문제는 "신뢰가 안 생긴다" 쪽일 수 있어요. 로고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문제를 잘못 짚었으면 그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끝난 거고요. 엠브레이스 팀이 네팔에서 과제를 다시 쓴 것도 정확히 이 단계였어요.
세 번째 아이디어 도출은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판단을 미루고 양을 쏟아내는 단계예요. 이 다섯 단계 중 AI가 가장 잘 거들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해요.
네 번째 프로토타입은 완성도를 높이는 단계가 아니라 빨리 틀려보는 단계고, 다섯 번째 테스트는 내 확신이 아니라 사용자의 반응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여기서 얻은 반응이 다시 앞 단계의 재료가 되면서 과정이 돌아요.

영국 디자인 카운슬이 정리한 더블 다이아몬드 프레임도 같은 원리를 다른 그림으로 그린 거예요. 넓게 벌렸다가 좁게 모으는 과정을 두 번 반복하는데, 처음 한 번은 문제를 찾을 때, 다음 한 번은 답을 찾을 때예요. 과정의 절반이 무엇을 만들지 정하기도 전인 '문제를 찾는' 데 쓰이는 거죠.
두 프레임의 공통점은 그리는 일이 전체 과정에서 차지하는 자리예요. 다섯 단계 중 결과물을 만드는 건 네 번째 한 칸뿐이고, 그마저도 완성이 아니라 실험용이에요.
인트로의 그 장면으로 돌아가 볼게요. AI가 10분 만에 뽑아낸 시안이 대체한 건 '만드는' 칸이에요.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칸도 잘 거들고요. 그런데 현장에서 틈을 발견하고, 진짜 문제를 정의하고, 무엇으로 갈지 정하는 일은 여전히 비어 있어요. AI 시대, 숫자를 지워라에서 짚었듯, AI가 채울 수 없는 자리는 숫자나 결과물이 아니라 판단이 필요한 자리예요.
그런데 다섯 단계를 안다고 해서 다음 프로젝트의 진짜 문제가 저절로 보이지는 않아요. 특히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일은 설명으로 듣는 것과 실제로 해내는 것 사이의 거리가 꽤 멀어요. 저희가 직접 겪은 장면 하나를 보여드릴게요.
한성교구라는 교육용 가구 회사와 작업할 때였어요. 처음 받은 요청은 익숙한 종류였어요. 브랜드가 낡아 보이니 비주얼을 새롭게 개선하고 싶다는 것. 그래서 저희도 '어떻게 하면 새로워 보일까'라는 질문으로 출발했어요. 그런데 이 질문을 붙잡고 있는 동안 작업이 계속 겉돌았어요. 새로워 보이게 만드는 방법은 수없이 많은데, 어떤 것도 이 회사여야 할 이유가 없었거든요.

방향이 보인 건 시안이 아니라 인터뷰에서였어요. 20년 전 학원용 의자는 대부분 목재 좌판이었는데, 이 회사가 국내 학원용 의자 최초로 플라스틱 성형 좌판을 개발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튼튼하겠냐는 의심 속에 출시된 그 의자는 지금도 이 회사의 베스트셀러이고, 이후 업계 전체가 플라스틱 좌판으로 전환하면서 학원 의자의 새로운 표준이 됐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회사는 어디에서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 내부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 된 지 오래라서요. 그 순간 문제가 다시 보였어요. 이 회사의 문제는 새로움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세운 기준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래서 질문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새로워 보일까'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어떻게 드러낼까'로요. 자세한 과정은 품질은 있는데 브랜드는 없을 때, 제조업 브랜딩의 시작 | 한성교구 브랜딩 비하인드에서 더 볼 수 있어요.

요청받은 문제는 "새로워 보이게 해달라"였지만 진짜 문제는 "가진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였던 거예요. 그리고 이 순간은 AI에게 시킬 수 없었을 거예요. 회사의 이력은 자료에도 적혀 있지만, 그 안에서 당연해진 이야기가 바깥에서는 브랜드가 된다는 걸 알아보는 일은 그 회사의 시간을 직접 들여다본 사람만 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브랜드 컨셉, 설명할 수 있나요?에서 말한 것처럼, 컨셉을 설명할 수 있으려면 먼저 진짜 문제부터 짚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처음 그 장면으로 돌아가 볼게요. 옆자리 마케터의 시안, 그리고 "이 정도면 됐네"라는 말이요.
글의 처음에서 그 장면은 흔들리는 순간이었어요. 지금은 같은 장면이 다르게 보이실 거예요. 그 시안이 대체한 건 디자인이라는 과정의 마지막 한 칸이라는 것. 그 앞의 칸들, 현장을 관찰하고 진짜 문제를 정의하고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일은 여전히 비어 있는 사람의 자리라는 것.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란 그리기를 그만둔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예요. 그리기만 하는 사람이요. 현장을 보고 진짜 문제를 정의하는 일은 건너뛴 채 결과물만 만들어온 디자이너. AI가 대체하고 있는 건 디자이너가 아니라,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예요.
다음에 AI의 시안 앞에서 "이 정도면 됐네"라는 말을 다시 듣게 되면, 이렇게 답해보세요. 네, 결과물은요. 그런데 이게 어떤 문제를 푸는 건지는 아직 아무도 정하지 않았어요.
디블러도 브랜딩에서 같은 일을 해요. 만들기 전에 이 브랜드의 진짜 문제부터 다시 정의하는 일이요. 여러분의 다음 작업도 그 질문에서 시작되면 좋겠어요.
문제 정의를 잘못 짚으면 이후 아이디어와 결과물이 아무리 좋아도 방향이 어긋나요. 요청받은 문제를 그대로 받아 적지 않고, 현장에서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진짜 문제를 다시 쓰는 과정이 결과물의 품질을 결정해요.
AI는 시안을 만들거나 아이디어를 대량으로 쏟아내는 단계는 잘 거들어요. 하지만 현장에서 관찰하고, 진짜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여러 대안 중 방향을 판단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이에요.
네. 디자인씽킹은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방식이라, 경영이나 공학, 의학처럼 다른 분야에서도 널리 활용돼요. d.school에도 디자인 전공자가 아닌 학생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어요.